- 심재금 前김포한강신협이사장 ‘김포에 태어나서’ 出刊
“한국인, 나아가 세계인으로 청송심씨 자랑스러워지기” 소망
저자 심재금 |
자신의 뿌리를 찾아 4백년 가까이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고 일본으로 끌려간 12대 조상의 궤적을 찾아 전국은 물론 일본까지 추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최근 김포한강신협 심재금 前이사장은 ‘심수관의 뿌리 찾기’ 김포에 태어나서(㈜하양인發刊·2024. 9)를 펴냈다. 250페이지에 이르는 저서는 심수관의 뿌리찾기와 심재금의 삶, 일, 사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청송심씨 12대 심찬(아호 심당길)의 흔적을 찾고 이들의 후손에게 뿌리와 조상의 묘를 알려준 사실이 밝혀지면서 문화외교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심재금 前이사장의 저서 ‘김포에 태어나서’는 일본 도자기의 대명사에 이어 심수관 가문이 만든 도자기가 일본 국보로 제정되기까지 ‘심수관 가문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담겨있다.
7년에 걸친 뿌리찾기
김포에서 스무살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았던 심당길(청송 심씨 곡산공파12대손).
나 역시 김포 약산에서 태어나 스무살이 될 때까지 살다 잠시 고향을 떠났다.
다시 고향을 찾아 살면서 나는 누구이며 이 김포는 나에게 어떤 곳인지, 지금 만나는 사람들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성찰하게 되었다. 이때 심수관 가문을 만났다.
2017년 세보를 보고 나의 뿌리를 찾아보며 방계도를 넓혀가던 중 나의 직계 11대 심우신 선무공신 할아버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 심당길 할아버지의 궤적으로 찾아 전국을 누비며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을 연구하고 대동족보를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김포 약산에 일본 심수관의 직계조상인 당길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고 당길이 스무살 즈음까지 김포에 살던 일을 알게 되면서 이 사실을 알리고자 수없이 대종회의 문을 두드리고 문중행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애써도 잘되지 않던 일이 순조롭게 풀려갔다.
15대 심수관이 2022년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자리에 도자기 명인과 가고시마 대한민국 총영사 자격으로 초청되었을 때 심당길의 아버지 심우인의 묘가 김포에 있다는 것을 대종회 심상억 문화이사를 통해 전달되고 김포방문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당길 조상이 ‘찬’이라는 호를 가졌다는 단서 하나로 7년에 걸쳐 방대한 자료를 추적하여 조상 묘를 찾고 알린 것은 청송 심씨 문중이 풀어야 했던 숙제였을 것이다.
424년 만의 귀향
2022년 7월 9일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 약산 일대에는 청송심씨 대종회의 많은 인사가 모였다. 이날은 1598년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 남원에서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붙잡혀 도공들과 함께 일본 가고시마로 끌려간 심당길의 15대손 심수관 4세가 424년 만의 귀향을 조상들께 고하는 자리였다.
15대 심수관은 고유제를 통해 “일본에 온 저의 조상은 4백년 동안 묵묵히 도공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조상들은 역경을 예술로 승화시켜 심수관家는 이제 ‘사쓰마야키’라는 일본을 넘어 세계가 인정하는 명품 도자기를 만드는 도예명가로 우뚝 섰다는 사실을 삼가 아룁니다. 또 일본으로 끌려온 17개 성씨 가운데 지금까지 한국 성을 쓰고 있는 집안은 오로지 심수관家 밖에 없다는 사실도 함께 아뢰는 바입니다”라고 고했다.
심당길은 20대 무렵 분조 활동을 하던 광해군과 함께 선조가 쓸 도자기를 구하러 전라도 남원성으로 갔다가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 도자기의 대명사가 된 심수관家를 탄생시켰다. 심수관 가문은 세계적인 도자기 집안이 된 뒤에도 고국에서 불씨를 가져다가 그 불로 도자기를 지켜내고 있으며 12대 심수관 이후 후손들은 그 이름을 습명하고 있다.
12대 심수관은 미국 시카고 콜럼버스 만국박람회에서 동상을 수상한데 이어 1873년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대형도자기(180cm의 대화병 한쌍·일본 국보지정)는 정교한 기술과 색감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으면서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서구세계에 사쓰마도 수출이 시작된 이후 ‘사쓰마’는 일본도기의 대명사가 됐다.
4백년전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처음 도자기를 구울 때는 흙, 유약, 기술은 모두 조선을 것이고 불만 일본 것이었다. 그렇게 최초로 구워낸 도자기를 ‘히바키리 찻잔’이라 하는데 ‘불만 일본 것’이라는 의미다. 반대로 4백년 되는 해에 14대 심수관은 일본의 흙과 유약, 기술로 만든 그릇을 한국의 불로 굽는 행사를 하고 아들에게 15대 심수관을 물려주었다. 당시 15대 심수관의 나이는 39세, 이후 한·일간의 문화교류는 더욱 활발해졌지만 그들의 진짜 고향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15대 심수관과 심재금 전한강신협이사장 |
다시 김포에서 만날 약속
15대 심수관은 고유제를 지내는 동안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를 저자 심재금은 저서에서 “‘그동안의 나의 여정, 심씨 문중 족보와 묘를 찾아다니며 문중에 알려고 했던 일이 어떤 조상의 보살핌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고유제에 앞서 심수관에게 어떤 선물을 할까 고심하다가 일본 심수관 일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직·수평 족보를 만들었다. 그동안 대종회가 만든 족보를 꼼꼼히 찾아보고 심수관과 관련된 사적을 찾아왔던 터라 족보제작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저자 심재금은 올해 8월 심상억 대종회총무이사, 심규선 일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사장(前동아일보편집국장)과 함께 15대 심수관(대한민국 駐가고시마 명예총영사)을 찾아 가고시마를 방문했다. 그리고 고유제에 이어 두번째 수직·수평 족보를 만들어 가고시마 현장에서 가계도를 재현했다.
가고시마 선로열호텔 만찬장에서 15대 심수관의 인사에 이어 심재금은 “심수관 일가는 한국, 일본을 넘어 세계인으로 우뚝 섰습니다. 샤쓰마 도자기로 가고시마를 부유한 도시로 만들면서 일본 경제에도 기여한 참으로 자랑스러운 우리 문중입니다. 이제부터는 한국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고 답사했다.
만찬이 끝나면서 심재금은 심수관에게 다시 고향을 찾을 것을 요청했고 심수관은 이에 답했다. 빠르면 내년쯤 다시 고향을 찾은 15대 심수관과 그 가문의 도자기가 김포에서 전시되는 기회를 기대해 본다.
“내가 책을 쓰는 까닭은 후손들이 조상들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을 것은 본받고 고칠 것은 고치면서 한국인, 나아가 세계인으로 청송심씨가 자랑스러워지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심수관家의 도자기 작폼 |
곽종규 김포문화재단 대외협력관 gyoo4967@naver.com